“뜨거운 여름이 다가오면 타는 듯 뜨거운 태양 아래 사람도 양도 모두 지쳐버린다.
느닷없이 북풍이 휘몰아치고 둘레는 불안에 휩싸인다.”
더위가 한창인 8월의 첫날입니다. 연일 후덥지근한 날씨 탓에 지치지는 않으셨나요? 지난 2018년 오늘은 1907년 기상관측 시작 이래 서울 최고 기온 기록을 경신한 날이기도 합니다. 당시 서울은 39.6℃, 대구 40℃, 홍천군 41.2℃로 정말 펄펄 끌었던 여름이었습니다.
비발디의 <사계La quattro stagione> 여름 1악장의 소네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보면 동서고금 막론하고 더위는 나만의 고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 혼자 덥고 힘든 게 아니라는 말이죠. 일상의 마음챙김 ‘숨과 쉼’이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는 삶의 이야기로 함께 8월을 시작해봅시다. |
|
|
마음 속 짐을 내려놓기
“제발 실수 하나만 해라” 역도 선수 장미란은 경쟁자 무솽솽이 경기대에 오르자, 마음속으로 내뱉은 말입니다. 그는 넘지 못할 큰 산처럼 여긴 경쟁자의 모습을 보며 상대가 바를 떨어뜨리길 바라는 마음을 가졌었다며, 부끄러운 기억이라고 고백합니다. 상대가 어떤 노력을 했든지 내가 1등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상대의 불행을 기원했던 이기주의적인 자기 모습을 알아차린 것이죠.😔 그리고 그 이후 “무솽솽아, 너 준비한 거 다 해라. 나도 내가 준비한 거 다 할 테니까”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고 세계 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누군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와서 박히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기분을 좌우하고, 거슬리는 기분 때문에 내 기량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을 채우면 그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죠. 타인을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어딘가 모르게 행동이 위축되고,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아마 장미란 선수도 상대의 불운을 바라는 자기 모습에서 무거운 부담감을 느낀 것은 아닐까요.
마음챙김 명상 중 ‘자비명상(Compassion meditation)’이라는 명상법이 있습니다. 다른 명상법과는 달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고, 감정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상의 한 방법입니다. 자비명상에 임할 때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홀로 자비명상을 수행하며 중도에 멈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불편함을 끌어냈던 ‘사건’에 몰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
|
내 밥그릇에 담긴 수행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게 준 선물은, ‘먹는 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6인 병실에서 어김없이 찾아오는 하루 세 번의 식사 때, 환자와 간병인들이 저마다 음식을 입에 넣기 바빴지만, 남편과 나는 물 한 잔도 앞에 두지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지요. 병실 가득 음식 냄새가 풍기는데 남편은 병상에 누워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어떤 음식도 먹고 싶지 않은데 무엇이든 먹어야 하기에 무엇이 먹고 싶은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떠난 사람은 떠났으니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면서 다시 밥상을 차리고 잘 챙겨 먹어야 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 이후 나는 도통 먹는다는 것에 의욕이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먹느라 삶을 허비합니다. 음식 재료를 구하느라, 그 재료로 요리하느라, 밥상을 차리느라, 그걸 입에 넣고 씹고 삼키느라, 치우느라, 뱃속에 들어간 것을 소화 시키느라, 미처 소화되기도 전에 입이 심심해서 또 무엇인가 간식거리를 찾느라 말이죠. 붓다의 하루 한 끼는 유명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600여 년 전, 인도 땅에서 지금처럼 하루 세 끼를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러니 수행자가 지켜야 할 1일 1식은 평범한 사람들의 식사를 아주 조금 절제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지키지 못하겠다면 대체 그런 사람은 자기 수련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음식의 양을 알고 절제하라는 조언은 붓다와 출가수행자에게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전륜성왕 사자후경」에서는 인간답게 살기 위한 도덕적 의무 사항에는 ‘먹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먹는 행위에 대한 충고에는 욕망을 절제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먹는 행위를 통해 온갖 욕망을 다 채우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고 보면, 먹고 있는 자기 모습을 살피고 먹는 행위를 가만히 살펴보는 일, 수행은 내 밥그릇에 담겨 있습니다. |
|
|
유서 쓰다 지쳐 아직 못 죽었다
장례지도사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상담입니다. 장례 문화가 달갑게 느껴지지 않는 만큼, 대부분의 문의 전화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한 상태로 걸려 오곤 하죠. 보통 고객은 가족이 임종을 앞두었거나 사망하신 이후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던 오후, 한 통의 장례 상담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저... 장례식에 관해서 좀 상담하고 싶어서요.”
“혹시 실례지만 가족분께서 위독한 상태인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제가요. 제가 죽거든요. 하하.”
문의자는 40대의 젊은 여성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본인의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는 중이라고 말을 이었습니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혹시 장난 전화는 아닌지 의심도 했지만, 걱정은 이내 사그라들었어요. 오히려 밝고 확신에 찬 그녀의 어조에서 감히 장난이라 여길 수 없는 오묘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종종 규모가 큰 영결식을 진행하기 위해 준비된 매뉴얼은 있었지만, 사전 장례와 같이 생소한 의뢰에 대한 적절한 답안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객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죠. 다급히 영상 제작 업체를 수소문하여 환한 미소를 촬영했습니다. 난 더 이상 아프지 않으니 슬퍼하지 말고 울지 말라며 위로하는 그녀의 모습과 육성은 장례식장에 재생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기사로 읽었던 ‘생전 장례식’에 대한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본인이 죽고 난 이후의 장례는 아무 소용이 없다며 살아생전 이별의 인사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 장례식의 목적이었어요.
|
|
|
함께 그리고 위로
한국에서는 설 연휴가 껴있던 그 주, 회사에서 되도록 점심시간에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내게 예의를 지키느라 에둘러 얘기했지만 결국 내 도시락 냄새가 역하게 느껴진다는 말이었어요.
얼떨떨함도 잠시, 당황스러웠고, 부끄러웠으며 수치심까지 들었습니다. 혼자 동떨어진 타지에서 좋아하는 음식도 못 먹는 곳에서 고생하며 일하고 있는가 하고 생각하니 서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퇴근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은 둘러앉아 명절 음식이며 떡국이며 이것저것 먹는 사진이 휴대전화 메시지로 전송돼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오자마자 냉장고와 냉동고를 열어젖히고 엄마 아빠가 바리바리 싸주신 식재료들을 모두 꺼냈어요. 음식을 뒤지던 중 엄마가 싸주신 젓갈이 보관이 잘못되었는지 팍 상해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짜증과 함께 눈물이 차올라 젓갈을 그냥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말았어요. 상한 젓갈을 찾은 김에 냉장고를 다 뒤집어 꺼내 정리하는 와중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I heard it is Lunar new year this weekend. What are your plans? (이번 주말이 설날이란 걸 들었어. 무슨 계획 있어?)” 평소 같으면 별일 없다고 답했을 텐데, 곧장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투정을 늘어놓았습니다. 친구도 함께 화를 내주고 있더군요. 그러고 나니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친구는 한국에서 설 연휴에 꼭 먹는 음식이 뭐냐고 묻더니 함께 만들어 먹자고 제안했습니다.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냉장고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어요. |
|
|
스마트폰을 나를 잊게 만든다는 점에서 스마트폰은 언뜻 명상과도 닮아있습니다. ‘스몸비(스마트폰+좀비)’라고 불리는 이들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마치 선정에 든 불교 선사를 떠올리기까지 합니다.
문제는 스마트폰이 부재한 순간 발생합니다. 그간 외면했던 불안이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이를 마주한 마음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맙다. 그러다 또다시 스마트폰으로 도망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패배감이 짙게 밀려오나 이러한 감정마저 서서히 잊혀지죠.
|
주위에 사람이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고독할 수 없습니다. 물론 고독은 고립도 아니고, 고립에 대한 두려움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립을 두려워하면 고독의 힘을 얻지 못합니다.
고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사막의 교부들이 광야로 떠났을까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벗이여, 너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사나운 바람, 거센 바람이 부는 곳으로.” |
|
|
|